프랑스 관련기사/내가 만난 사람들

기억하고 싶은 얼굴

빠리 정병주 2010. 3. 26. 17:54

 

내 인생에 만난 큰인물이다.

이른바 사회저명인사라고 하는 사람들을 우연치않게 꽤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기억나는 사람들.

시간순서로 열거해본다.

 

법정 스님: 1990년 봄으로 기억된다. 아직 보일 장소가 변변찮아  파리 불자들의 모임이 한국식당 가람에서 있었고, 나는 불교신자인 집사람을 데려다   주기 위해 갔었고, 차 안에 있기도 뭐하고 워낙 스타 스님이시기도 하도 하고 , 한 때  즐겨읽기도 했던지라  말씀을 듣기 위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처음 가까이에서 뵙게 됨(아마 그 때 한 달에 한번씩 영국에서 건너 오셔 말씀을 해주시던 스님의 성함이 법수 스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 마디 한마디가 아침 나뭇잎에 맺혀있는 이슬 방울 처럼 맑고 깨끗한 느낌으로 다가 왔었다 아마 이 스님의 말씀 덕분에 아직도 내가 절 주위를 맴돌수 있게 된 것 같다 ).

그후 파리 길상사의 개원식에서 우리 세 식구에게, 보문, 보안, 여의주 라는 법명을 주시면서 가가이에서 뵐 수 있는 인연을 갖게 된다. 내가 직접  스님과 우리 딸 예슬이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도 있고, 특히 스님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귀하게 간직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위의 스님의 사진을 보면 , 스님의 마음과 글, 모습이 되살아 나는 듯하다. 

 

정명환 교수: 서울대 교수, 성신여대교수, 학술원 회원,

대학원 논문 준비 시절 우연히 만나게 되어 실질적인 논문 지도교수가 되었다. 연구실 방문 때마다 런닝차림으로 연구하시다가 손을 씻으시며 나를 맞이하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아프리카 근무시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자 선듯 승낙해주셨고, 결혼식 사례는 술 한병으로 족하다 하심.

 

내가 직장을 다니다가 파리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씀드리자, 그 동안 선생께서 정리해놓으신 영구 노트와 평생 간직해놓으셨던 선생의 친필이 씌여진 졸라에 관한 책들을  모두 내게 주셨다. 언젠가 돌려드려야 하는데 아직 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다.

선생이 사모님과 함께 파리에 들리셨다가, 내게 어디를 잠시 가 줄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셔서 선생과 함께 13구 중국 동네 근처의 카페에서 선생과 선생의 만남 장면을 멀ㄹ리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한국 최고의 학술회원과 옛 친구의 만남 광경을 보며 참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 친구 분은 젊은 시절 파리로 유학을 오셔서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하시고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평생을 파리에서 임시교사 등을 하시면서 지내시는 친구 분 이었다. 가끔씩 살아있다는 것 만이라도 서로 연락하자는 선생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하다.

이원경, 체육부 장관, 청와대비서실장

대학원 재학중 여자 동창의 소개로 우연히 통역을 하다가 만남. 당시 청소년체육부 장관으로 내가 변변찮은 불어 통역을 하면서 땀을 빼는 모습을 보고, 장관실을 나갈 때 힘들지 하면서 어깨를 쓸어주던 인자한 모습과  따뜻한 손이 아직도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느껴지는 듯하다. 나중에 YS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다.

 

노태우, 올림픽위원회위원장 시절,

덩치 큰 군인의 모습으로 일상적이고 의례적이고 외교적인 발언만 했던 것으로 기억됨. 나중에 대통령되다.

 

정주영, 당시 대한체육회장, 현대그룹회장, 초대로 울산 현대조선 방문.

 

고은 시인, 가끔 내 말을 작은 노트에 적는 모습이 인상적. 그와 헤어진 후, 그가 앉았던 자리에 싸인한 그의 시집  한권을 두고 갔다. 그의 마음씀이 시적이었다.

 

샤르팍 박사, 프랑스 노벨 물리학 수상자. 프랑스 명문 고등사법학교 학생들과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다. 큰 체구에 가장 작은 르노 자동차의 클리오를 손수 운전하며 우리ㅣ 인터뷰 장소에 나타나던 모습이 선하다. 2010년 돌아가시다. EBS방송의 이공계 위기 프로그램을 준비하다.

 

소피아 앙티폴리스 과학연구단지의 창설자와의 만남. 과학연구는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에서 나오는 것이고,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 활동 속에서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다>괗과 대화와 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