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폭력사건의 진실과 거짓-70년 전에 발생한 역사의 비극
- 오넬 리샤르 기자-
*리오넬 리샤르, 프랑스 피카르디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주요저서로 <예술과 전쟁(파리, 플뤼리엘/아쉐트 출판사)>과 <나치즘과 야만(브뤼셀, 콩플렉스 출판사)>이 있음.
내전 중인 스페인,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16시 15분에서 19시 30분까지, 바스크의 상징도시인 게르니카는 폭탄세례 속에 박살이 났다. 주민과 함께 밀집지역 전체를 파괴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5백 개의 건물 중 4백 개의 건물이 소실되었고, 6천 명의 주민 중 일천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1937년의 파리 만국 무역박람회를 위해,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희생자들에게 헌정한 걸작에 게르니카 학살이 영감을 주지 않았다면, 이 학살은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저명한 역사학자들의 저서에만 기록된 채, 아마도 그 기억들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왜, 프랑코파는 빌바오 시(市)(역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주요도시)에서 35킬로 떨어진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를 파괴하려 했을까? 그 이유는 바스크 지방이기 때문이다. 이 지방은 스페인에 인민전선의 승리를 가져다준 1936년 2월 국회의원 선거 이후 드디어 정치적 자립의 지위를 획득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새 정부가 수립되자, 7월 17-18일 프랑코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바스크 주민들은 합법성을 존중하기로 하였기 때문에 프랑코 군이 세력을 확장할 경우 군대의 공격을 피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1937년 4월, 카탈로니아 지방과 아라공 지방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북부 스페인 영토에서 바스크 정부만이 공화국에 아직까지 충성을 다하였다. 바스크 정부는 철광산, 제철소, 조선소가 풍부한 이 지역을 통치하였는데 반란군은 그것이 필요했다. 북부 국가주의파의 군대를 통솔하는 폭동 군 지도자 중의 한명인 에밀리오 몰라 장군은 자신이 3주 안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프랑코 장군에게 보고했다. 5만 명의 보병과 백여 대의 전투기가 그의 지휘 하에 있었다. 그는 추가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병한 이탈리아 군대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고 또한, 기갑부대와 전투기, 폭격기로 편성된 전투비행단으로 조직된 6천5백 명의 콘도르 비행단의 독일군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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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적>>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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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몰라 장군은 바스크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북부 지역에서 내전을 신속히 종결하기로’ 결정했음을 통보했으며, ‘만약 즉각 항복하지 않으면 군수공장을 시작으로 모든 비스카이예 지방(Biscaye, 역주: 스페인의 북부 지방으로 바스크의 북서부 지역, 빌바오 인구의 30퍼센트가 거주하는 지역)을 공격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응답이 없자, 그는 3월 31일 위협을 가했다. 사령관인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중령의 명령에 따라, 콘도르 비행단의 항공기와 융커와 하인켈 중폭격기들이 빌바오 시의 주변 마을들을 조직적으로 폭격하였다. 4월 26일 월요일 아침, 게르니카와 두랑고를 소이 폭탄으로 공격하도록 조종사에게 임무가 주어졌다. 이틀 후, 두 밀집지역은 저항 없이 포위되었고, 5월 한 달 내내, 동일한 전략이 확대되었다. 1937년 6월 19일, 빌바오 시가 함락되자, 바스크 관리들은 짐을 꾸려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으로 출발하여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게르니카 이야기로 돌아오자. 4월 27일 화요일, 프랑코파 들의 임시 수도인 살라망크(Salamanque)의 쿠데타군 지휘부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반(反)공화파를 지지하는 모든 외국 신문들에 게재된 성명서는 국가주의파의 항공기에 가해진 유죄를 ‘‘중상모략’’이라고 부인하였다. 폭격의 주범은 ‘‘붉은 군대’’(역주: 공화파 지원을 위해 약 6만여 명의 국제여단 지원했는데 그중 60퍼센트가 공산주의자였음)라고 프랑코파는 선언하였다. 즉, 항복할 수밖에 없는 공화파들이 마을을 방화했으리라는 것이다.
바스크 정부 대통령인 호세 안토니오 아구이레는 이 주장을 듣고 분노하였다. 폭격은 ‘‘스페인 반란군을 지원하는 독일 비행기들’’에 의해 행해졌다고 그는 확언하였다. 국립 라디오 (Radio-National)방송국은 그의 주장에 반대하여 그를 거짓말쟁이로 취급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히틀러 군대에 대한 그의 단죄는 뉴스 진행자에 의해 삭제되었다. 청취자들은 오직 반란 군대에 대한 명예침해에 반대하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만을 들어야 했다 : ‘‘프랑코 군대는 방화하지 않았으며, 무기로 정당하게 정복했습니다. 스페인이 붉은 군대의 나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가 파괴를 했습니다.’’
프랑스 공산당계열과, 넓은 의미의 좌파계열의 언론 속에서, 콘도르 비행단의 비행기에 의해 수행된, ‘‘시민들에 대한 가증할 만한 폭격’’에 대한 국가주의파의 책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즉각 받아들여졌다. 또한, 그 작전이 콘도르 비행단에 의해 수행되었다는 증거는 수없이 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거들은 사기꾼들의 주장을 중단시키지 못하였다. 프랑스 극우파의 지도자인 샤를르 모라스의 주장이 그 전형이다. 1937년 5월 11일, <악시옹 프랑세즈>지에서, ‘‘수많은 폭탄을 퍼부었다는 독일 비행기에 대한 우화’’는 ‘‘붉은 군대의 범죄’’를 위장하는데 사용하는 ‘‘볼셰비키식’’의 조작이라고 여전히 부정되었다.
이런 종류의 왜곡은 19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도 스페인에서 어느 정도 지속되었다. 국가주의파의 결백을 밝히고, 유럽 내에서 자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복원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사료편찬자들은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즉, 그들은 히틀러와 괴링(Goring), 콘도르 비행단에 모든 잘못을 돌렸다.
뉘른베르크 국제재판 이후 20년 동안은 쉽게 잘못을 회피할 수 있었다. 반민주적인 스페인 우파의 아첨꾼들은 공화파에 반대하는 봉기를 비난하기 위하여, 그리고 프랑코파와 파시스트 국가들 간의 연합을 반대하기 위하여 위험을 감행하였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로 날조하여, 희생자의 수를 백여 명으로 축소하면서 게르니카 폭격의 범위를 최소화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프랑코의 지휘본부는 콘도르 비행단이 계획한 공격을 인지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고, 게다가 독일 조종사들은 ‘‘테러’’에 어떤 사전 계획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도시 변두리에 있는 무기 공장과 하천교량을 목표로 하였으나 목표물에서 빗나갔을 것이다. 화재와 시체더미는 ‘‘폭격 실수’’의 산물일 것이다. ‘‘순교 도시’’에 대한 모든 논평들은 단지 ‘‘신화’’의 장식물 뿐일 것이다.
독일 측은 그에 관해 어떤 입장일까? 독일 국민들은 오직, 1939년 4월, 프랑코 장군의 승리 이후, 콘도르 비행단의 ‘‘쾌거’’만을 알고 있었고, 많은 출판물들은 그 성과에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성공한 저서 중의 하나는 이전에 1914년-1918년의 군인들을 칭송했던 저자인 베르너 보이멜부르크의 것이다. 1940년, 그의 저서 <스페인을 위한 전투>는 프랑코 군에 대한 히틀러의 지원을 정확하게 평가하면서, 스페인 내전의 모든 사건들을 10개의 장(章)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모든 저서 속에서 콘도르 비행단의 학살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 준 ‘‘만행’’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심지어 보이멜부르크는 나치 독일의 공식 대변인인 폴키셔 베오바히터의 유명한 주장을 충실히 따르면서, 게르니카는 ‘‘붉은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 라고 그는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몇 년 전부터 유포된 것과는 반대로, 루프트바페 사령관인 헤르만 괴링 원수는 뉘른베르크 판사들 앞에서 이 비극에 대한 히틀러군의 책임을 자백하지 않았다. 스페인을 독일 공군의 훈련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자신이 허가했음을 단순히 인정하였다. 또한, 나치 정부의 선전상(相)인 요세프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서 오히려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스페인 국가주의파들의 무죄 주장에 농락당한 그는 콘도르 비행단의 비(比)개입을 믿고 있는 듯했으며, 군단의 개입을 부인하느라 난처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미스테리는 1945년 이후에야 밝혀졌다. 1978년, 자신의 행위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이 ‘‘가장 뜨거웠던 역사의 장(章)’’임을 나중에서야 깨달은 아르헨티나에 망명해있던 조종사 빌프레드 폰 오본과 같은 전역군인들의 증언들이 나왔고, 독일 문서기록이 공개되었다. 그 기록 속에는 나치 당국과 국가주의파 간의 협력이 너무나 많이 발견되어, 프랑코군 수뇌부가 콘도르 비행단의 공격배치를 몰랐을 것이라는 가정은 진실처럼 보이지 않는다. 빌바오 시의 함락 전날인 1937년 6월 20일, 프랑코 장군은 히틀러의 ‘‘신의’’와 ‘‘위대한 독일 국민의 신의’’를 보여준 것에 대하여 히틀러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전보를 보냈다.
어떤 군사적 목적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게르니카 폭격은 흔히 단죄된다. 그러한 주장을 몰라 장군은 공개적으로 반박하였다. 이 폭격은 당시에 전 유럽을 위협했던 야만적 행위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 폭력이며, 상대방에 대한 무제한의 물리적 파괴 의지이며, 사실의 왜곡이다.
망각을 피하기 위해, 게르니카에는 확실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고 있다. 2003년에는 <평화 박물관>이 개관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해야 한다. 피카소 덕분에, ‘‘파시즘’’ 이란 단어 아래 경청해야 할 것의 의미가 가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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