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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

빠리 정병주 2008. 10. 6. 00:47

1815년 6월 18일 - 나폴레옹, 워털루에서 패전

*이글은 오마이 뉴스 블로그 <곰PD의 전쟁이야기>http://blog.ohmynews.com/gompd/ 에서 퍼온 글입니다.



1815년 오늘, 벨기에 브뤼셀 남쪽 15Km 지점의 ‘라 벨 알리앙스’ (La Belle Alliance) 에서 벌어진 전투는 이후 유럽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이 전투의 승자인 웰링턴 공은 자신의 사령부가 있던 곳의 이름을 따 이 치열했던 전투의 이름을 붙였죠.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이 전투를 ‘워털루’ 전투로 부르고 있습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이듬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제4차 대(對)프랑스 동맹군에게 패배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자리를 빼앗기고 지중해의 ‘엘바’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하지만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동맹국 사이에는 다툼이 벌어졌고 이 틈을 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5일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 남부에 도착합니다. 나폴레옹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루이 18세’는 군대에 나폴레옹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나폴레옹을 잡으러 보낸 군대가 오히려 자신들의 옛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자 외국으로 도망치고 말죠. 닷새 뒤인 2월 20일, 나폴레옹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에 무혈입성 합니다.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은 자신에 반대하는 유럽 국가들과 협상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합니다. ‘자신은 전쟁을 원하지 않고, 다만 프랑스만을 통치하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영국과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동맹군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집결시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1769.8.15~1821.5.5)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나폴레옹도 군대을 소집해 주력군 12만 4천명을 프랑스 북쪽, 벨기에로 이동시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는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등의 연합군 9만 5천명이 주둔하고 있었죠. 또 벨기에 리에주에서 출발한 프러시아군의 규모는 11만 3천명이었습니다. 병력면에서는 프랑스군이 열세였지만, 연합군과 프러시아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 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 나폴레옹은 신속하게 기동하여 ‘한 놈씩 손 봐 준다’는 계획을 세우죠. 먼저 나폴레옹은 '네이' (Ney) 원수에게 병력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 공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카트르 브라’ (Catre Bra)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는 자신은 8만 병력을 이끌고 1월 16일, ‘리니’ (Ligny)에서 프로이센군과 일전을 벌입니다. 이 전투에서 1만 6천명의 사상자를 낸 프로이센군은 퇴각하죠. 프로이센군의 총사령관 ‘블뤼허’ 원수도 말에서 떨어져 부상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동쪽으로 퇴각했다고 오판을 합니다. 프로이센군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었죠. 나폴레옹은 17일 아침, ‘에마뉘엘 드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프로이센군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그 시간 프로이센군은 동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웰링턴 군과의 합류를 위해 서쪽으로 진군 중에 있었죠. 한편,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웰링턴 군은 ‘몽 쉘 장’에 방어진지를 구축합니다. 웰링턴 군의 전면에 포진한 프랑스군은 보병 사단을 전면에, 기병 여단을 후방과 좌,우 양익에 배치합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프랑스군의 전면에 전개 시키고 그 후방에 기병대를 집중 배치했죠.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마침내 6월 18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나폴레옹의 공격개시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죠. 전날의 비로 벌판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려 기병과 대포의 이동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심한 치질을 앓고 있었던 나폴레옹이 심한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진군명령을 내려야할 시기를 놓쳤다고도 합니다. 어쨌든 프랑스군에게 공격명령이 내려진 것은 오전 11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프랑스군은 포격을 통해 보병사단의 진격로를 여는 한편, 웰링턴군의 주력을 유인하기 위해 프랑스군 좌익에 있던, 전략적으로 별 가치가 없는 위그몽성 저택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으로 하여금 이곳이 프랑스군의 목표라고 믿게 하려는 의도였죠. 하지만, 웰링턴은 이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예비 병력을 풀지 않았습니다. 웰링턴은 방어에 전력을 다하면서 프러시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연합군의 주저항선은 전진해 오는 프랑스군에 대해 가로로 긴 3Km의 산등성이였습니다. 양측의 전력이 비슷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내보낸 ‘그루시’ 원수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내지만, 그루시 장군은 엉뚱한 곳에서 프로이센군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오 무렵, 멀리서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는 것이 목격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애타게 기다리던 그루시의 군대가 아니었죠. 웰링턴 군과 합류하기 위해 이틀을 달려온 프로이센군이었습니다.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의 진격로 쪽으로 예비 병력이었던 4개 보병사단을 급파합니다. 프로이센군이 웰링턴과 합류한다면 각개격파는 물 건너간 얘기가 되어 버리고, 프랑스군의 패배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네이' 원수의 기병 돌격.


기병 공격과 보병의 정면 돌격에도 웰링턴군의 전선이 열리지 않자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오후 4시, 다급해진 나폴레옹은 포격을 재개했고, 웰링턴은 포격으로 인한 병력 소모를 막기 위해, 병력을 능선 너머로 후퇴시킵니다. 이것을 영국군이 후퇴하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한 ‘네이’ 원수는 휘하의 기병을 총동원해 공격에 나섭니다. 원래 기병의 돌격은 강력한 돌파력으로 충격을 주어 적어 방어선을 뚫는 데는 유용하지만, 뚫린 방어선을 넓히고 진격로를 만드는 것은 보병의 역할이죠.  그런데 용감하지만 의욕만 너무 앞섰던 네이 장군은 보병의 지원 없이 기병의 일제돌격을 명령한 것입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놀라서 네이 장군의 돌격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에게는 돌격을 멈추게 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나폴레옹뿐만 아니라 웰링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죠. 지축을 울리며 달려드는 4천 8백 명의 기병 돌격 앞에 언덕 위에 있던 영국군 포병 11개 포대는 삽시간에 무너져 버렸고, 1만 4천명의 웰링턴 군 보병도 언덕 뒤로 물러나서 방진을 펴며 방어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승기를 잡기에는 영국군 보병의 방진이 너무도 견고했죠. 기병의 돌격도 보병의 총검 숲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스스로도 말을 네 마리나 잃어가며 선두에서 기병의 돌격을 지휘하던 네이 원수는 또다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릅니다. 영국군 보병의 방진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보병이었음에도, 오후 5시 네이 장군은 휘하에 남아 있던 기병 10개 연대 4천5백 명 모두를 긁어모아 기병 돌격을 명령한 것이었죠. 그에게는 기병 말고도 예비대로 보병 사단과 여단이 각각 하나씩 있었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가 이 보병대를 활용해 기병과 합동으로 공격을 펼쳤더라면 이미 한계에 달했던 영국군 보병의 방진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난 후였습니다. 뒤늦게야 자신의 실책을 알게 된 네이 장군은 보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프랑스군의 기병대는 만회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있었죠. 더군다나 네이 장군은 기병의 아까운 희생으로 차지한 영국군 포대의 포들을 고스란히 내버려 두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65문에 달했던 포들은 프랑스 기병대가 후퇴하고 난 뒤 고스란히 다시 영국군의 수중에 들어가 다시 프랑스군에 포탄을 날리기 시작했던 것이죠.

'웰링턴' (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5.1~1852.9.14)


이제 전투의 주도권은 웰링턴 공에게로 넘어갑니다. 오후 6시, 프로이센군이 전장에 도착해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최후로 투입한 근위대 8개 대대 병력조차 영국군의 치열한 포화 속에 단 2백 명 만이 남은 채 포위되고 맙니다. 프랑스 근위대의 지휘관 ‘캉브레’ 장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영국군을 향해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며 마지막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우뢰와 같은 영국군의 포성 앞에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갑니다.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의 종말이었습니다.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전사자 수는 5만 명, 영국군과 프러시아군은 각각 1만5천명과 7천명을 잃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으며, 1821년 그 곳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나이 52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