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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카바레-풍자, 저항, 자유정신의 주유소

빠리 정병주 2008. 6. 27. 01:48

 

 

카바레 풍자ㆍ저항ㆍ자유정신의 ‘주유소’

 

검은 고양이, 금송아지 굴, 길 잃은 개, 양머리 아래 지하실, 11인의 처형인…. 이 기묘한 단어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유럽 지식인들의 집합소 역할을 한 ‘카바레’의 이름이다. 지금 우리가 카바레하면 떠올리는, “사모님, 제비 한 마리 키우시죠”라 느물대는 젊은 사내나 술독에 빠져 흐느적대는 취객은 없었다.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예술가와 냉소적이지만 열정적인 지식인들이 그 때 그 유럽 카바레에 득실댔다. ‘카바레’(에코리브르)는 서구 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순간마다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카바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 카바레의 탄생

카바레라는 말은 포도주 창고 또는 선술집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15세기 중반에 이미 카바레는 공연장으로 활용됐다. 순회 극단이나 가수, 곡예사 등 이런저런 사람들이 무대에 올랐고 손님들은 노래를 따라불렀다.

샹송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카페와 비스트로에서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오락이었다. 샹송은 사랑의 노래처럼 분위기를 무르익게 해주는 소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언론의 기능까지 담당했다. 인쇄에 필요한 기계와 비용 때문에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신문의 대용이었던 셈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 민중의 신문인 샹송은 민주주의의 도구이자 풍자의 무기가 되었다. 가수가 혼자 나와 노래를 부르는 비스트로와 카페는 프랑스 고유의 공연 형태인 ‘카페콩세르(음악을 들려주는 음식점)’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많은 관중을 수용하는 카페콩세르에서는 풍자와 저항이 가득한 공격적 노래를 즐기긴 힘들었다.

카페콩세르에서 카바레가 갈라져 나온다. 카바레 탄생의 도화선은 젊은 시인 에밀 구도가 결성한 예술가 모임 ‘이드로파트’다. 이들은 매주 모여 작품을 선보이고 시와 노래, 일인극, 짤막한 소품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드로파트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이 때부터 카바레는 두 가지 특징을 갖춘다. 카바레는 아방가르드를 자처하던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 무대로, 당대의 사건을 다루고 도덕과 정치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풍자무대로 떠올랐다. 재치가 반짝이는 저항 정신과 반골 기질, 혁신적인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 초점을 조정하는 카바레 공간은 유럽 지성사의 변두리에서 혹은 중심에서 빛을 발했다.

▶ 반골들의 보금자리

로돌프 살리는 이드로파트의 회원들과 함께 1872년 최초의 예술 카바레 ‘검은 고양이’를 세웠다. 이 세상에서 존경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던 살리는 오만한 달변과 예리한 현실감각을 더해 사교계부터 화류계까지 온 세상을 마음껏 조롱했다. 고상한 분들도 가명을 사용해 이 카바레를 찾았지만, 건방진 사회자의 눈에 띄면 바로 비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1897년 ‘검은 고양이’는 문을 닫지만, 수많은 후발 주자들이 생겨나 자유의 기운을 퍼뜨리고 모든 기성체제에 거침없는 모욕을 퍼부었다.

20세기 초 뮌헨에는 엄격한 도덕률을 강요하고 공연 예술에 공권력 개입을 허용한 하인츠 법이 통용됐다. 이 법에 항의하는 거리 행진을 벌인 사람들 중 11명은 시대착오적인 도덕률과 기존 관습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카바레를 열자는 데 뜻을 모았다. 각오만큼 이름은 무시무시했다. 하인츠 법 등 사회의 위선을 박살내겠다는 듯 ‘11인의 처형인’이라고 작명했다. 처형인 각자도 죽음, 피, 교수형 밧줄, 손도끼 등 소름끼치는 별명을 지었다. 카바레 안에 고문과 처형 도구를 진열했고, 판사용 가발에 죄수의 칼을 채운 해골을 카바레의 상징으로 삼았다.

191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문을 연 카바레 ‘길 잃은 개’는 급진적인 지식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지식인들은 카바레를 제 2의 집으로 삼아 아방가르드의 아이디어를 가다듬고 공연을 펼쳤으며 혁명을 옹호했다. 러시아 시문학계, 미래파, 낡은 상징주의의 무기력한 모호함은 이 카바레 안에서 채이고 밟히고 내던져졌다. 그러나 ‘길 잃은 개’의 지식인들은 그토록 사랑했던 혁명 때문에 처형당하고 숙청당하는 등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독일에서 카바레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은 사회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냈다. 에리히 케스트너는 게슈타포에 두 번이나 체포되는 등 위협에 시달렸지만 나치 시대 독일을 떠나지 않으며 야만적인 역사를 똑똑히 지켜봤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죽은 병사의 시’를 지어 나치를 비웃은 죄로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격분한 한 나치 관계자는 “감히 지도자를 겨냥한 잡설과 농담이 들려온다면 카바레를 폐쇄할 것”이라 엄포를 놓기도 했다. 나치의 손길을 피해 해외로 떠난 독일 지식인들은 망명지에서 카바레 ‘스물네 마리 검은 양’ 등을 세워 히틀러의 얼굴에 열심히 먹칠을 했다. 런던 최초의 망명 카바레 ‘등불’ 사람들은 국제적인 해프닝을 일으키기도 했다. 마르틴 밀러는 발성부터 몸짓까지 히틀러를 흉내낸 공연을 펼쳤는데, 1940년 만우절에 BBC는 이 공연을 방송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소굴

189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카바레 ‘네 마리 고양이’가 문을 열었다. 이 카바레는 새로운 카탈루냐 화풍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다. 위대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도 ‘네 마리 고양이’에 작품을 걸었다. 1900년 당시 19세 소년이었던 피카소의 전시는 그다지 열광적인 평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카바레에 출입하던 사람들의 후원에 힘입어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된다. 피카소는 ‘네 마리 고양이’를 위해 메뉴판 표지를 만들었고, 이후로도 알림판과 엽서를 제작하고, 단골들의 초상을 그렸다.

카바레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자궁이나 다름없었다. 볼거리는 카바레의 본질이며, 아방가르드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그 볼거리들을 만들어냈다.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의 카바레 ‘라팽 아질’은 10년 동안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회합 장소였다. 피카소, 아폴리네르, 마리 로랑생, 앙드레 살몽 등이 ‘라팽 아질’에 죽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미있는 사건도 있었다. 문인 롤랑 도르젤레는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파리에서 명성을 얻기란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보로날리’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보로날리를 과격파라는 새로운 화풍의 창시자로 포장한 도르젤레는 당나귀 꼬리에 물감을 묻힌 붓을 묶어 그럴싸한 작품을 얻어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이 어이없는 장난을 마티스, 루오 급으로 반응하자, 도르젤레는 언론에 자신의 ‘낚시질’을 밝혔다. 신문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나귀, 예술 학파의 태두 되다.”

▶ 긴 수명, 큰 영향력

카바레는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1956년 동독에 문을 연 ‘양머리 아래 지하실’과 불평불만분자들은 공산당 정권보다 더 오래 버텼다. 미국 대도시에는 유럽 카바레의 형제뻘인 소규모 클럽들이 속속 생겨났다. 재즈 선율이 흐르는 이 클럽들은 비트족의 아지트였다. 스탠드업 코미디도 뿌리를 찾자면 카바레 무대의 공연이다. 카바레의 적통이 이렇게 내려왔는데, 자유부인이 누빈 무도장을 카바레의 전부라 생각한다면 심히 섭섭한 일이다.

저자 리사 아피냐네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예술과 풍자만으로 테러와 참사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는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움켜쥔 은유가 그다지 막강한 무기는 아닐지 몰라도 의식의 전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바레의 풍경 위로 브레히트의 얄궂은 웃음이 어른거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야 변변찮아도 내가 없었다면 통치자들의 자리는 좀더 안전했겠지. 희망하건데’” 강수정 옮김.

 

2007.4.28 헤럴드 생생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