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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피카소처럼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모두가 피카소처럼 문화를 지향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할 것이다. 문화란 선악, 시비, 유무를 떠나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삶의 최고 단계이다. 때론 철학적 진리나 과학적 사실까지도 다 포함하기에 그 범위는 광대(廣大)하다. 그래서 어릿광대와 그렇게 잘 통했나보다. 피카소는 처음부터 부자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하다 보니 돈도 따라 붙은 것이다. 이번 전시회 전체 작품가격만 6천억이고 140여점 평균가격이 43억 원이고 그 보험료만 5억5천만 원이라니 그는 얼마나 부자인가!
전시장에 들어서니 그의 어록들이 인상적이다. 마치 피카소가 옆에 속삭여주는 것 같다. 그는 끊임없이 미(美)를 발견하며 살았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는 말인데 이런 정신이 바로 현대미술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그는 평생 서서 일하며 그림 그리는 노동자처럼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에서 보는 그의 눈빛은 늘 이글거리고 그의 몸에는 힘과 위엄과 에너지가 넘쳐 보인다. 그의 죽기 1년 전에 그린 그림 '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사람(1972)'을 보면 정말 경이롭다. 청색·장밋빛 시대에 못지않게 그의 투우사 같은 기질이 말년에도 여전했다.
그는 잠시도 새로운 실험과 도전과 창조를 위한 변화와 발전을 끊이지 않았다. 평생 실험가처럼 모험가처럼 살았다. 노끈이나 신문지로 만드는 콜라주을 탄생시켰고 기존 통념 깨는 극단의 단순화 정신을 낳았으며 이는 입체파를 낳는 모체가 되었다. 또한 그는 미니멀리즘, 추상파 등 현대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괄목할 만한 과학발전에도 2차례의 끔찍한 세계전쟁과 학살을 경험하면서 피카소는 조국 스페인이 파시즘의 소굴이 되는 것을 보다 못해 결국 도망치듯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런 측면에서 소속감이 없던 그가 나치즘·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1944년에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한 건 당연했다. 그는 당시 공산계열의 레지스탕스 투쟁을 높이 샀다. 이번 전시회 제목처럼 20세기는 분명 그의 '위대한 세기'였다. 20세기를 다원적 사회로 나아가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철재로 건물을 짓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을 세워 세상을 다시 본 에펠처럼 청색·장밋빛 시대 이후 입체파라는 충격적이고 경악할 미술의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상을 다시 봤다. 그런 이면에는 '울고 있는 여인'에서 보듯 아프리카 원시조각과 평면미술에서 '원구, 원통, 원뿔' 방식으로 입체미술의 가능성을 여는데 결정적 영감을 준 세잔의 영향을 받아 세계미술사의 새 장을 열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보인다 이번 전시회 주제가 <피카소의 사람들>인데 피카소는 정말 인간을 좋아했던 작가다. 그는 잠시도 인간이라는 동반자 없이 숨 쉴 수 없는 존재였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정신적 유대감과 함께 육체적 친밀성을 요구했다. 작가로서 자신의 예술에 대한 강력한 동조자나 지지자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쏟다 분 사랑이나 우정의 강도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 소나기성 세례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죽마고우인 카사게마스가 1901년 자살했을 때 피카소는 정말 망연자실했다. '청색시대'는 작가에게 미래에 명약이 될 수 있었던 가난과 고통이 극심했다. 그는 특히 시인들을 좋아했다. 막스 자콥, 기욤 아폴리네르,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장 콕토, 루이 아라공, 르네 샤르, 자크 프레베르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밖에도 독일 화상인 스타인 남매, 야수파 대가 앙리 마티스 그와 견해를 같이 했던 조르주 브라크 등과 끊어지지 않는 토론을 나누었다.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그의 자서전을 읽는 것 같다. 시대별로 그림이 확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연인이 바뀌면 그의 그림이 완전히 달라짐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 정말 이 세상에 여자를 이렇게 사랑한 남자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에로스는 모든 창조의 샘이었다. 성적 쾌감은 미적 감동과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피카소에게 있어 회화는 일종의 성행위나 배설행위였다. 그래서 평론가 존 리처든슨은 "그에게 예술은 섹스의 변형이고 섹스는 예술의 변형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피카소는 평생 7명의 연인과 사랑으로 창작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첫째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1904)는 포근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성격의 야성형 여자였고, 둘째 연인 에바(1911)는 몸이 약해 항상 골골하는 청순가련형 여자였고, 셋째 연인 발레리나 올가(1917)는 러시아출신의 무용수로 고전미를 지닌 귀족형 여자였다.
7명의 여자 중 피카소가 65살에 만난 21살이었던 프랑수아즈만 유일하게 그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죽은 후에 목매 자살했고 나머지 여자들도 피카소의 망령에 시달렸다. 그리고 자클린도 자살했다.
그러나 프랑수아즈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저는 저희 아버지나 남자친구와는 대화가 되지 않는데 저보다 3곱절 연상인 당신과 말이 통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이 그렇게 바랐던 화가생활에만 전념했다. 인텔리답게 <피카소와의 삶(Life with Picasso)>이라는 책도 썼고 피카소와 추억을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피카소는 프랑수아즈가 떠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역대 여자들이 그를 태양처럼 숭배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승리자 그러나 피카소는 말년에 자클린을 만나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고 온갖 유명세를 다 누리면서 인생의 말년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이혼을 경력이 있던 자클린은 그를 신처럼 모셨고 결국 나중에는 정식 아내가 되었다.
전쟁과 혁명의 20세기에 악명 높았던 무솔리니, 히틀러, 프랑코는 다 가고 사회혁명가 레닌까지도 제치고 피카소가 완전한 승리자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붓 하나로 세계를 호령한 독재가인 그가 어떻게 세월이 갈수록 더 높이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일까 궁금하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진정 삶과 예술을 사랑하고 인간을 아끼고 좋아했으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덤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도 얻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그처럼 행복한 사람은 아직 못 봤다. 우리도 그에게서 배울 삶의 방식이 많다. 하여튼 그는 위대한 20세기 바로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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