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선진국의 문화기획:
-발자크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
지난 5월 20일은 발자크가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날이었다.『인간 희극(La Comédie humaine)』총서를 쓴 발자크를 거론하지 않고 프랑스 소설에 대하여 얘기할 수 있을까? 사실주의 작가들의 선구자로 칭송되고, 루카치 등 마르크스주의 문학 이론가들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그린 비판적 사실주의 작가의 모범으로 꼽히는 발자크. 2,472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약 95권의 소설로 이루어진『인간희극』의 세계를 꼼꼼하게 관찰 분석한다면, 7월 왕정 시대의 사회계급들의 특징과 모순들이 드러난다. 발자크는 자신의 소설을 당시의 동사무소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쓰겠다는 야심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소설의 지위를 인문과학의 한 분야로 승격시키려는 야망을 가졌었다. 19세기의 과학의 분화에 힘입어 의학, 생리학, 역사, 철학과 동등한 자격을 소설에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의 『인간희극』총서를 '연구(Etud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풍속연구, 철학적 연구, 분석적 연구로 분류했다.
1799년에 투르에서 태어난 발자크는 공증인 되기를 거부하고, 소설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혁명적이고 현대적인 야망을 품는다. 책상 앞의 나폴레옹상(像)을 바라보며, '나폴레옹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성취하리라' 결심한다. 글을 쓰면서 출판사, 인쇄소, 광산, 농장, 증권 등의 사업에 손을 대지만 빚만 불릴 뿐이었다. 그러나 늘어나는 빚이 오히려 그의 왕성한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초기에는 독서실용 대중소설을 익명으로 쓰는데 전념하여 한해에만 16권으로된 4편의 소설을 쓴다. 매일 밤 12시에 일어나 아침 8시까지 글을 쓰고, 15분 동안의 아침 식사 후 다시 오후 5시까지 글을 쓴 후 저녁을 먹고 잠들어 하루에 약 20시간 글을 썼다고 한다. 멋이 아닌 '노동'으로서의 글쓰기를 실천한 것이다. 주당 35시간 노동하는 오늘의 '행복한' 프랑스 노동자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1839년, 발자크는 이미 쓴 소설과 앞으로 쓸 것을 합하여 총서의 제목을 『인간희극』이라 정한다. 이 제목은 단테의 『신의 희극(La Divine Comédie)』에서 착상한 것으로, 신이나 상상이 아니라 자신이 발딛고 숨쉬는 현실속의 사람들을 이야깃거리로 삼겠다는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선택된 인물은 사회 속의 어떤 유형을 대표한다. 따라서 현실의 인물이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현실과 문학의 관계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된다.
사실주의 이론의 성립, 발전에 대한 논쟁이 발자크를 중심으로 끝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발자크의 글쓰기 과정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출간 직전까지의 발자크 자신에 의한 고치기, 덧붙이기, 빼기의 과정을 연구하고 완간된 텍스트, 간행되기 전의 교정쇄, 작품구상노트 등을 비교하여 작품의 발생과정과 생산조건을 밝힌다.
발자크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의 대학(투르 대학, 파리의 7대학과 8대학 12대학) 및 학회들은 학술회의를 준비하고 있다. 1959년 결성된 '발자크연구회'는 학술지 『올해의 발자크』를 40년간 발간하며 발자크 연구를 주도한다. 올해는 <2000년에 발자크 읽기ㅡ결산과 전망>을 주제로 5월에 학술회의를 개최하였고, 이와 함께 '국제발자크연구회(GIRB)'는 전세계의 발자크 연구를 연결하고 조직화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일반 독자를 위한 발자크 기념행사를 알아보자. 특히 발자크가 태어난 투르 시에서 많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미셸 뷔토르, 미셸 샤이유 등 현역작가들을 초청하여 발자크와 현대작가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발자크 박물관의 개관과 더불어 『인간희극』에 나타난 파리(Paris)가 조명되고, <발자크와 회화>전으로 들라크르와, 세잔, 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그린 발자크가 전시된다. 발자크가『골짜기의 백합』을 쓴 장소인 사셰(Saché) 성(城)에서는 로뎅이 제작한 발자크 상(像)들을 전시하는 <로뎅의 발자크> 전이 열리고 <발자크의 인쇄소>란 주제로 인쇄소를 경영했던 발자크를 조명하며, <고리오 영감의 진짜 이야기>를 야외에서 공연한다,
또한 발자크의 작품이나 생애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지역들도 기념행사로 지역의 자부심을 높이고 관심을 집중시켜 객(客)을 부른다. 발자크가 『인간희극』의 첫번째 소설 『레 슈앙』을 쓰기 위해 칩거했던 푸제르 성(城)이 있는 푸제르 시와 방돔 시, 앙굴렘 시 등에서는 발자크 문학기행을 기획하고 있다.
발자크 연구와 기념행사의 중심인 파리의 '발자크의 집'은, 1840년부터 1847년까지 작가가 빚쟁이들을 피해 가명으로 세들어 글을 쓰던 곳으로, <창작행위에 대한 성찰, 예술가의 이미지와 공중의 예술 수용>을 기획하고 있다.
출판계 역시 발자크 탄생 200주년에 발맞추어 『인간희극』이전의 초기 소설들을 간행하였고(로베르 라퐁, 〈부켕 총서〉), 그의 삶과 글쓰기에 대해 이미 많은 전기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올해 다시 몇권이 보태졌다. 피에르 스프리오(Pierre Spriot)는 작가의 삶과 작품을 연결하면서 환상가로서의 발자크를 돋보이게 했던 1992년의 『가면을 벗은 발자크』를『오노레 드 발자크 1799-1850』(아르쉬펠)이란 제목으로 증보하여 출간하였고, 나딘 사티아(Nadine Satiat)는 『발자크 또는 광란의 글쓰기』(아셰트)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발자크 연구 성과와 서간문에 기초하여 또 한 권의 전기를 출간하여, 계속되는 돈걱정과 출판사의 글독촉, 빚쟁이들의 시달림 속에서 초인적으로 글을 쓰는 발자크의 모습과, 동료나 가족 특히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인간적인 발자크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로제 피에로(Roger Pierrot)는 발자크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그의 글쓰기와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한스카 부인에 관한 책 『에브 드 발자크』(스톡)를 펴냈다. 그는 이미 쁠레이아드판『인간희극』의 간행과 갸르니에 출판사의 『발자크서간문 전집』의 간행에 참여하였고, 1990년에는 한스카 부인에게 쓴 발자크의 서간문을, 1994년에는 발자크의 전기(파야르, 1999년에 재간행 )를 쓴 발자크 전문가이다.
그에 의하면, 한스카 부인은 폴란드의 귀족으로 14살 때 한스카 백작과 결혼, 우크라이나에 살면서 발자크의 작품을 인연으로 작가와의 편지 교환을 시작하여, 1832-1848년의 기간 동안에 발자크로부터 414통의 편지를 받는다. 37살 때 그녀의 남편이 죽자 발자크는 약 1,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259통의 편지로 청혼을 한다. 그녀와의 만남과 동반여행 그리고 함께 우크라이나에 체류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편지를 쓴 셈이라 한다. 1850년 3월에 결혼하여, 5월에 함께 파리로 돌아와 8월 18일 발자크가 죽기 직전까지 아주 짧은 기간을 함께 살았을 뿐이지만 발자크 사후 약 32년 동안 파리에서 '에브 드 발자크'란 이름으로 살며 발자크의 작품도 출판하고 1882년 생을 마감한다.
발자크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영화계도 한몫한다. 파리의 한 영화관은 올해 1월부터 영화화된 발자크의 작품을 매월 한편씩 상영중이며, 국립영화박물관은 6월에 28편의 발자크 관련 영화를 상영하였다. 발자크의 작품은 지금까지 장편 영화로 약 50편, TV 영화로 약 25편이 영화화되었는데, 발자크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발자크에 대한 텔레비젼용 영화가 드파르디외, 파니 아르당, 쟌 모로 등의 화려한 배역으로 제작중이다. 왜 발자크의 작품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영화화하려 했을까? 미친 듯한 글쓰기와 연속된 사업의 실패, 외국여인과의 사랑 등, 그의 삶 자체가 그의 작품『인간희극』의 등장인물들을 작가 자신의 삶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하려는 것일까?
발자크 탄생 200주년 행사를 바라보면서, 언뜻 보면 별것 아닌 것을 프랑스 특유의 호들갑으로 떠벌린다 싶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필자의 눈엔 이것이 바로 문화의 선진국인 프랑스의 힘으로 읽혀진다. 작은 것에 대한 철저함. 매년 여러 지방이나 단체들이 인연에 따라 한 작가, 한 인물, 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기획을 마련하여 그 이해를 깊게 한다. 올해는 단지 그 대상이 발자크였을 뿐이다. 내년에는 다시 누구인가를,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열광적으로 '스스로' 공부하여, '남들에게' 그리고 '여기저기' 알릴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문화와 역사는 깊이와 두께를 한층 더해 갈 것이다. (1999년 가을, 라쁠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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