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책, 저자, 출판사를 죽인다?
-파리 국제도서전-
제20회 파리 국제도서전에 예상을 훨씬 웃도는 28만 명이 입장하였다고 프랑스 언론이 요란하다. 주최측은 3월 17일부터 22일까지 6일 동안의 예상 방문자를 22만 명으로 잡았다고 한다. 이 도서전은 직업적 출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과는 달리 일반인과 출판인을 애써 구분하지 않는 유럽 최대의 출판문화행사로 알려져 있다. 작년의 캐나다 퀘벡 주 초청에 이어 올해는 유럽의 변방 포루투갈을 초청하고 1998년 노벨상 수상작가 사라마고(Saramago) 등 40여명의 포루투갈 작가를 초청, 포루투갈 문학 바람을 프랑스에 불게 했다. 1,500명 이상의 저자 또는 작가가 도서전이 주최하는 독서와 관련된 토론과 논쟁에 참가하고, 41개국의 서점이 초청되었다.
어떤 방송 인터뷰는 일년에 한번도 동네 책방에 가지 않던 사람이 이 도서전을 방문했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보여준다. 도서전 입장객의 증가가 반드시 독서인구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올해의 입장객 증가를 프랑스 언론은 중요한 문화적 의미로 읽어내려 한다. 인터넷과 음향, 영상 등 멀티미디어가 시대를 압도하는 듯하지만 '종이책' 인구도 여전히 증가하고 있음을 언론은 입장객 통계로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번 도서전에서 방문객들이 가장 관심을 집중한 것은 책과 컴퓨터, 인터넷을 결합한 '전자책(electronic book)'이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전자책인 소프트북(Softbook)을 비롯하여 로켓트 이북(Rocket eBook), 에브리북(Everybook) 등 미국이 주도하는 이 부문에 프랑스의 시탈(Cytale)사가 뛰어들어 여름 판매를 계획하며 야심적으로 전자책을 선보였다. 이 전자책은 무게가 1.2Kg이고, 크기는 포켓판 문고 보다 약간 크고 포터블 컴퓨터 보다 조금 작지만 약 100권 분량의 내용을 저장할 수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활자와 페이지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축소 확대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 동안 활자가 너무 작아 책읽기에 불편을 겪어야 했던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다. 화면을 개선하여 포터블 컴퓨터보다 읽기가 편하고, 모뎀, 스피커, 헤드폰이 내장되어 있어 이 책 소지자는 인터넷으로 시탈 사이트에 접속하여 원하는 책을 내려받고, 책값은 비밀번호를 이용하여 은행카드로 지급한다. 다른 전자책과 달리, 내려받은 내용에 보호장치가 있어 저자의 저작권이 확실히 보호된다. 문학작품은 물론 신문, 잡지, 가이드, 게임 등을 내려받을 수 있어 기존 출판사의 작업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디지털화 한다면 이 전자책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보인다. 전자책은 종이책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책의 내용에 음향 영상 등 멀티미디어 기능이 첨가되어, 책을 보다 편하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디지털 시대의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책이 대중화되려면 저자와 지적 소유권 문제를 해결하여 더 많은 책목록을 확보해야 하며, 판매가격을 낮추어야 한다. 전자책이 평면화면에 활자의 확대 축소가 가능하여 읽기가 편하다고는 하지만 그림이 있는 텍스트의 확대 축소에는 아직 문제가 있으며, 텍스트를 읽다가 독자가 자신의 생각을 주(誅)로 첨가할 수도 있고, 원하는 단어나 부분을 찾을 수도 있는 등 컴퓨터의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아직은 가격이 너무 비싼 편이다. 모두들 디지털 시대를 말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이다. 아무리 오래된 책이라도 한번 디지털화하면 언제라도 수량에 관계없이 출판이 가능하고 인터넷을 통하여 내려받을 수 있다. 따라서 전자책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 대형 출판사들은 내용 확보를 위하여 기존 출판사와 공동작업을 협의하고 새로운 내용의 개발을 위하여 뜨거운 전쟁을 이미 시작하였다고 출판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이번 도서전의 최대 화제는 전자책의 일반 공개였지만, 공공 도서관과 저자 사이에 불거진 대출권(貸出權, droit de prêt) 분쟁도 큰 화제였다. 통계에 의하면 1980년에 5천 9백만 권에서 1998년에는 1억 5천 4백만 권으로 대출도서가 증가하였다. 그런데 도서관의 대출도서 증가를 프랑스의 작가와 저자들은 마냥 즐거워하지 않는다. 대출도서는 증가하였지만 책 한 권당 평균 인쇄 붓수는 1만 4천 권에서 8천 4백 권으로 줄어들었으며, 서적 판매량은 5년째 상대적으로 정체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공 도서관이 계속하여 무료로 책을 대출해주는 것은, 도서관이 저자와 출판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하며, 정부가 저자의 대출권을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의 지적 재산권의 일부인 대출권을 도서관이 보호해 주지 않는다면 결국 도서관이 책과 작가, 출판사를 죽이는 셈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20년 동안 독서인구 개발을 위해 협력 관계에 있던 작가-출판사 측과 도서관 측이 자칫 적대 관계로 바뀔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공 도서관의 증가가 반드시 책에 악영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1998년의 한 연구보고서도 있긴 하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오히려 도서관이 새로 설립된 주변지역에 위치한 서점에서 청소년용 서적과 만화책의 판매량이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번 도서전을 계기로, 프랑스 작가들은 2001년부터 공공 도서관의 무료 책대출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일년 전부터 출판사측이 저자와 출판계약을 맺을 때, 〈저자는 출판사에 대출권을 위임한다〉라는 조항을 새롭게 첨가하면서 구체화되었고 적극화되었다. 유럽연합 회원국 사이의 정책을 조율하는 1992년 유럽연합의 규정은〈작품의 원본과 복사본의 임대나 대출을 허가하거나 금지하는 권리는 작가에게 있다〉고 명시하여, 저자의 대출권을 지적재산의 일부로 인정한다. 이 규정이 회원국을 구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 등은 이 규정의 적용을 연기하고 있는데, 최근 전국출판조합(SNE)과 프랑스의 문학인협회(SDGL)가 이 규정의 적용과 대출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 독서의 전통이 발달된 북구와 앵글로 색슨계의 국가들(미국 제외)은 프랑스와는 달리 이미 오래 전부터 작가와 저자의 대출권을 인정하고 있다. 덴마크가 1946년 최초로 대출권을 인정하였으며, 영국은 20년 전부터 대출권을 인정하여 1999년 1만 7천명의 저자에게 약 4천만 프랑(약 68억 원)을 지급하였고, 네덜란드는 1980년 법을 제정하여 대출권에 대하여 국가가 비용의 3분의 1, 도서관이 3분의 2를 부담하여 약 4천 5백만 프랑(약 76억 5천만 원)을 저자에게 지급하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저자에게 70 퍼센트, 출판사에 30 퍼센트를 나누어 지급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가 대출권에 관한 비용을 일반 대출자가 부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공공단체가 부담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저자의 대출권을 인정하면 공공의 독서 접근 권리가 줄어든다는 주장은 이쯤 되면 약간 궁색해 보인다.
프랑스의 저자와 출판사측은 책 한권에 대하여 일인당 년 50프랑(약 8천 5백원)의 대출료를 요구한다. 이 정도의 액수는 영화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이 영화 한편을 보기 위해 투자하는 입장료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프랑스의 사회당 정부는 작가-저자들의 대출권 요구의 정당성에 공감하면서도 시장 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 듯 새로운 부담을 유권자에게 부과하는 대출권을 인정하는 제도의 시행을 늦추고 있다.
프랑스의 국영TV 방송인프랑스 2가 금요일 저녁마다 방송하는 독서대담 프로인〈문화의 온상(溫床)( Bouillon de Culture, )〉은 프랑스 TV문학방송의 대명사이다. 이 프로에 출연한 작가들의 토론과 논쟁의 결과가 책의 판매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바로 다음날인 토요일에 서점을 찾는 사람들중 다수가 방송에 출연했던 저자의 책을 사간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TV의 독서대담 프로는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 컴(Amazon.com)의 주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의뢰한 〈TV가 독서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도서전에 앞서 발표되었는데, 이 연구 보고서는,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소수의 대형 출판사가 막대한 영향력의 TV 책광고를 이용하여 책시장을 지배할 때 중소형 출판사의 활동이 약화될 것이라고 보고하며, TV에서 책광고를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현 도서-방송 정책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보고서는 현재 국영 및 민영 TV의 문학방송이 국민의 독서 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TV의 책 소개 프로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우려하였다. 그런데 TV 프로 편성자들은 시청률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정부가 정책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 경우, TV문학방송의 시간이 감소할 것이라고 지적하며, 청소년 대상의 문학방송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유럽연합 회원국간의 정책 협조가 점점 활발해짐에 따라, 프랑스에서만 TV 책광고를 금지하고 있는 '프랑스적 예외(Exception française)' 현상을 다른 회원국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TV의 책광고 금지정책의 변화 가능성에 출판계는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도서전에서는 또한 20년 전에 제정된 도서가격정찰제의 문제점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공공 도서관을 위한 책 구입을 위해 파리 시는 일년에 약 30억 원의 예산을 지출하는데 언제나 3-4개의 대형 서적도매상이 이를 독점 공급하고 있으며, 이런 결과는 위의 도서가격정찰제의 모순에서 비롯한다고 전국출판조합은 밝혔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1981년 제정된 이 법은 책 정가의 최대 5%의 할인을 허용하고 있는데 단체 판매의 경우에만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본래 전국에 퍼져있는 소형 서점에게 책을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서적도매상들이 공공 도서관 등에 대한 단체판매를 독점하고 있다. 전국출판조합에 의하면 대형 서적 도매상은 출판사로부터 큰 폭의 할인을 받아 정가의 약 27%까지 할인하여 도서관에 책을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매 서적상은 20% 이상의 할인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하면서, 단체판매에서 제외된 소매 서적상들은 제정된 지 20년이나 지나 새로운 모순이 드러난 도서가격정찰제의 개정을 요구하였다.
파리 국제도서전 이야기를 핑계삼아 프랑스에서의 책에 관련된 논의를 전한다. 책에 관련된 문제에는 문학인이 가장 앞장서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듯 싶다. 공공 도서관에 대하여 대출권리를 집단적으로 강력하게 요구하는 운동을 주도하는 곳도 프랑스의 문학인협회이다. 이 모임은 주로 시인, 소설가, 극작가 시나리오 작가 등 문학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리 국제도서전을 계기로 출판산업의 비중이 비디오 등 영화산업보다 4배나 더 크고, 책 수출 세계 4위인 프랑스에서의 책에 관련된 정책적 논의를 귀동냥 해보았다.
(2000년 여름, 라쁠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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