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 탄생 200주년
- 19세기 프랑스의 문학과 정치적 총화
최근의 프랑스 작가 중 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는 누구일까? 렉스프레스지에 의하면, 라쁠륨 지난 겨울호에서도 언급된 우엘벡이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주변 유럽국에서는 단연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한다. 프랑스의 누보로망 이후, 그를 진정한 작가로 인정하든 않든 우엘벡은 주변 유럽 독자들에게 다시 프랑스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그의 작품은 현대 서구 사회의 다양한 성풍속을 다루어 오늘날의 서구사회의 총체적인 성적 방탕을 간파하고 있는 반면, 다른 유럽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등의 앵글로 색슨 국가에서는 그의 작품이 너무나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오랜 세월을 거쳐 프랑스 국민들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일까? 몰리에르 스탕달 플로베르 사르트르? 무모한 질문이지만 흥미꺼리가 되리라. 프랑스의 어린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한 달에 두 세편의 고전과 현대시를 외우기 시작한다. 그 목록에서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가을 시편』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다. 프랑스 사람들은 시(詩)로 위고를 만나 소설『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가련한 사람들이라는 뜻)』, 연극『뤼 블라스』, 오페라『리골레토(위고의 『왕은 즐거워』를 베르디가 각색한 작품)』등으로 위고와 평생을 함께 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아시아 끝에 자리한 우리도 어린 시절,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시작하여 한평생 고통을 겪는 『레미제라블』속의 장발장의 생애에 슬퍼하고 분노하였다. 요즈음 지구촌 어린이들은 디즈니판 만화영화 『노트르담의 곱추』속의 에스메랄다와 곱추 카지모도의 슬픈 사랑에 눈물을 흘리고, 청소년과 어른들은 뮤지컬 『노트르담의 곱추』에서 카지모도 역을 맡아 노래를 부른 카나다 출신의 남자 가수 갸루(Garou)의 쉰목소리에 빠져든다.
프랑스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좌우파로 나뉘어져 자신들의 견해를 뜨겁게 표명하고 토론하고 투쟁한다. 작가 위고는 약간은 우파적 성향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죄우파 양진영으로부터 공통적으로 높게 평가되는 예외적인 작가이다. 사회당 출신의 미테랑 정권 시절인 1985년에도 위고 서거 100주년 기념 행사가 학계를 중심으로 하여 온 프랑스에서 떠들석하게 치루어졌다고 한다. 있는 위고가 태어난지 200주년이 되는 올해 2002년에는 우파 대통령 시락이 집권하고 있으니 더욱 많은 각종 추모행사가 줄을 잇고있다.
그는 1802년 나폴레옹 휘하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정치가로 제정, 왕정, 공화국 등의 총체적 격변시대를 온몸과 머리로 헤쳐나가다 1885년 온국민의 슬픔과 애도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고의 삶과 작품은 19세기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격변과 혼란을 온전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을 간단하게나 언급하겠다.
그의 생애는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집권하여 황제로 즉위한 것에 반대하여 벨기에 영국을 거쳐 대서양의 영국령 게르네세(Guernesey) 섬으로 망명하여 살던 망명 시대(1851-1870)와 그 이전 시대(1802-1851), 그리고 그 이후 시대(1870-1885)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귀족으로 태어난 위고는 시인으로 등단하여 루이 18세 왕의 연금을 받고 루이 필립 왕을 지지한다. 1843년, 사랑하는 딸 레오폴딘이 죽자 글쓰기를 잠시 중단하고 자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정치 활동을 펼치며, 1848년 2월 혁명시에는 국회의원이 된다. 1851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위고는 억압적 정치를 피해 망명했다가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으로 제3제정이 무너지자 조국으로 돌아온다.
우리에겐 위고의 문학적인 면만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최근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있는 사형제와 관련한 그의 정치 활동과 주장은 중요하게 조명되어야겠다. 1829년 작품인 『사형수의 마지막 날』에서, 위고는 감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인의 고통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정치활동 내내 집요하게 밀고나갔던 사형제의 폐지 투쟁을 시작한다. 그는 사형수의 잘못을 보여주려 하지 않고 사형의 잘못됨과 사형의 참혹함을 보여주려 하였다. 신의 존재를 믿는 신자인 위고에게 인간이 인간을 처형하는 사형제도는 신에 대한 모욕이고, 공화주의자 위고에게 사형은 인간성에 대한 모독이었다. 위고는 주장한다:〈인간 생명의 불가침성은 권리 중의 권리이다. 사형은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 진보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다. 사형대가 세워질 때마다 우리는 모욕당하는 것이다. 이 범죄는 우리의 이름으로 행해진다.〉〈사형은 야만의 특수하고도 영원한 기호이다.〉1846년 루이 필립 왕을 저격 시도한 범인을 변호하지만 범인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한다. 그는 작가로서 모든 노력을 다해, 또한 국회의원으로서 행동과 투표로써 이 오래된 비지성적인 사형제도와 투쟁할 것을 피력하고, 공개된 광장에서의 처형에도 반대하였다. 1870년 망명지에서 돌아온 후, 위고는 파리 코뮌 자체에는 반대하지만 그 참여자들을 처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여론과 맞서 싸우고, 도망 사형수들을 위해 정치망명권을 주장하며 벨기에에 있는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제공하였으며, 죽기 전까지 상원의원으로서 파리 코뮌 참가자에 대한 사면과 사형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여 참여 지식인의 모범을 선구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의 사형제는 1981년 사회당 출신의 미테랑 대통령이 집권시 법무부장관 바뎅테르(Badinter)에 의하여 폐지된다.
위고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한편, 당대 민중의 빈곤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고, 다가오는 혁명을 대비하라고 역설한다. 빈곤을 해결하지 못하면 가난한 사람들의 저항을 불러올 뿐이라고... 또한 1848년 까베냑 장군이 민중폭동에 대처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언론검열을 시행하자, 법의 정지는 기괴한 상황이라고 위고는 주장하면서 국회가 그러한 상황을 용인해서도 안되고 국회가 위대한 민중을 그러한 상황에 두어서도 안되며, 언론자유는 보호해야 할 문명의 무기라고 주장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위고는 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교육은 국가가 담당해야 하며, 종교와 분리되어야 하고, 무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든 국민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져 가는 한국의 공교육 여건과 이에 따라 확대되는 사교육 부담을 고려할 때 150년전 프랑스에서의 교육에 대한 토론과 분위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현재 프랑스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의무무상교육이며 대학의 1년 등록금은 1000프랑-18만원 정도이다.)
위고는 왕당파로 시작하여 1848년 혁명을 체험하면서 공화주의자가 되고 나폴레옹3세의 독재에 항거하며, 죽을 때까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공화주의의 양심, 자유의 선구자, 인류애의 예언자, 억압받는 자들의 옹호자로 활동한다.
부켕(Bouquins)판 『위고 전집』은 모두 15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7500페이지에 달한다. 그는 시 소설 연극 여행기 등 모든 문학 쟝르를 넘나든다. 위고는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로 청년기부터〈샤토브리앙(Chateaubriand:1768-1848 귀족출신의 초기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rien)〉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1822년-1828년까지의 초기 시작품들에서 부르봉 왕가에 대한 충성심을 숨김없이 밝히면서 문학적으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한다. 1827년에는 『크롬웰(Cromwell)』의 서문에서 비극과 희극을 섞고, 장소 시간 행동 등의 일치 법칙을 배제하여 예술 속의 자유를 주장하여 낭만주의 이론가로서 자리잡는다. 1833년에는 극의 국가적 사회적 인간적 임무를 주장하고, 극시인의 목표는 위대함과 진실함에 도달하는 것이며, 드라마가 군중을 위한 영원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830년 위고는『에르나니(Hernani)』의 서문에서〈신의 목소리와 유사한 민중의 높고 강력한 목소리는, 이제부터 시가 관용과 자유라는 정치적 표어와 같은 표어를 갖기를 요구한다. 〉라고 역설한다. 위고에게 드라마는 예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장소이며, 그 속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현재를 조명함로써 역사를 연출할 수 있어야 한다.
『가을 시편(1931)』『징벌(1853)』『사색(1856)』등이 대표적 시작품이며, 『난장이 나폴레옹(1852)』은 반체제 작가로서 나폴레옹 3세를 풍자하기도 한다. 1862년에 발표된 『레미제라블』은 1845년부터 쓰기 시작한 작품으로 프랑스 문학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지금까지 20여번이나 영화화되었다. 쟝발장의 성공과 실패 이야기와 소년 가브로쉬(Gavroche)의 혁명의 이야기를 얽어짜 정치적이고사회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으로, 작품의 전편에 빈곤이 유령처럼 가득차 있으며 혁명이 가까이 다가옴이 느껴지는 낭만주의적인 장편민중문학으로 평가된다.『윌리엄 셰익스피어(1864)』『바다의 노동자(1866)』『웃는 인간(1869)』『93년(93년은 공포정치가 시작된 1793년을 의미한다-1874)』 등은 당대의 언어와 지식, 역사가 혼합된 걸작들로 평가된다. 대중적 인기 속에 10번이나 영화화 되었고 현재 여러 나라에서 뮤지컬로 각색되어 공연되고 있는 『파리의 노트르담』에 대하여는 언급을 생략하겠다..
열정적인 정치적인 활동과 더불어, 모든 문학 장르를 골고루 선택하여 프랑스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있는 위고의 문학적 권위와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스스로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정치적 권위와 비교하여, 위고를 문학의 태양왕(le Roi-Soleil de la littérature)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위고 탄생 200년을 기념하여 올해 그의 작품들이 다시 출판되고 극작품이 다투어 공연될 계획이며, 생애와 작품을 새롭게 조명하는 책과 저서가 줄지어 나오고 있으며, 많은 학술행사와 전시회, 방송 프로가 2002년 내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위고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프랑스를 보며, 몇년 전 세상을 떠난 미당 서정주를 둘러싼 우리 사회 각 진영의 엇갈린 평가와 최근 이문열을 들러싼 혼란을 멀리서 소문으로 접하며 우리도 21세기에는 한국의 빅토르 위고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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